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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과서, 섣불리 손대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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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고나 행동이 지극히 규범적이고 표준화된 사람을 '교과서적인 사람'이라 이른다. 교과서는 그 시대의 표준화된 지식과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어서다. 물론 교과서가 아무리 보편성을 추구하며 표준화를 꾀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보편타당하거나 절대적일 수는 없다. 특수성을 전제하지 않은 보편성은 있을 수 없을뿐더러 당대에는 비록 옳은 지식이나 진리라 여겨졌던 것일지라도 언제든지 새로운 발견과 검증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교과서의 편성이나 수정은 전문적인 논의와 검증절차, 그리고 국민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교과서로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교과서의 권위는 교사의 교수행위와 평가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학교에서의 교육활동이 가능하게 한다. 교육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관련된 문제라면, 교과서는 바로 그 요체라 할 수 있는 '무엇을'을 담는 그릇에 해당한다.

전문적인 검증과 국민 공감대

교과서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떤 정파의 이해관계나 입맛에 따라 휘둘린다면, 교사들과 학생들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에 대한 좌표를 잃고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교과서는 교육과정 개편을 주기로 하여 개정되기 마련이다. 교육과정 개편 없는 교과서 개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군정 때의 교수 요목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교육과정을 개편해왔다. 교과서가 아홉 번 정도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7차 교육과정을 부분적으로 개편, 보완한 '새 교육과정'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교육과정마다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평균 잡아 치면 한 교육과정은 7년, 길어야 8년 정도의 기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우리의 경우, 새 교육과정이 고시되고 시행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곧이어 다음 교육과정 개편작업에 들어가서 교육과정 개정시안을 만들고 여기에 따라 교과서를 개발한다. 그리고 두어 해의 시범운영을 하며 고치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새 교과서로 새 교육과정을 시행하게 된다.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데는 적어도 7∼8년 세월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상 한국에서 이렇듯 7∼8년 주기로 교육과정이 개편되는 것도 다른 나라에 견주어 너무 빈번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너무 빈번한 교육과정 개편

프랑스는 1989년의 '교육에 관한 법'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육과정이란 쉽게, 그리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교육과정을 손대면 교과서를 바꾸어야 하고, 필연적으로 학교교육과 입시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시제도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조변석개하는 것은 이처럼 빈번한 교육과정 개편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교육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는 우리처럼 국정교과서로 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검인정교과서제로 다양화할수록 좋다. 대개의 교육선진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일수록 교육의 공적 기능을 중요시하고, 당연히 공교육 인프라가 매우 잘 갖춰져 있다.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정권의 이해에 따라 마음대로 주무르고, 더군다나 교육을 시장에 완전히 맡기는 나라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다.

새 정부 들어 불쑥불쑥 내미는 섣부른 교육정책들, 예컨대 '영어몰입교육'이나 '4ㆍ15 학교자율화 조치'로 대변되는 '교육시장화' 정책들은 그나마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 가운데서도 고치고, 지키고, 다듬어온 우리 공교육을 뿌리째 뒤흔들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게 한다.

더구나 대한상공회의소라는 기업인단체와 매우 독특한(?) 학문적 입장을 지닌 '뉴라이트' 계열 소수 학자의 뜻대로 교과서를 손보겠다는 교육과학부장관의 발언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이들이 대안 교과서로 펴낸 <한국근현대사>를 구체적으로 읽어보진 못했지만, 들리는 바로는 "일본강점기의 근대화 성과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이란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 무시하고 싶지만, 교과서 편성과 검정권한을 쥔 정부부처 수장의 말이니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우리는 아이들에게 독재와 일제지배를 정당화하고, 북한주민을 뿔 달린 짐승으로 가르치던 국적도, 영혼도 없는 교사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도대체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그의 꿍꿍이속이 자못 궁금하다.

/오인태(교육학박사ㆍ경남작가회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