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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음악은 내 인생의 중매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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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허경아 씨는 음악을 팔기보다 설렘을 판다고 했다.  
 

지금 20대 중후반 이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테이프가 늘어지게'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듯싶다. '워크맨'으로 대표되는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레코드 가게도 참 많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고 싶은 음반을 레코드 가게에서 구입해서 겉 비닐포장을 뜯고 카세트에 처음 넣을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어떤 것은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레코드 가게 역시 변화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디서든 찾을 수 있었던 레코드 가게가 이제 마산에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밖에 남지 않았다. 허경아(48) 씨는 그 가운데 하나를 마산 창동에서 운영하는 사람이다.

방송 DJ 되고파 일한 레코드 가게 사장과 백년가약

"꿈이 방송 DJ였어요. 우선 레코드 가게에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꿈 많은 스무 살, 그는 방송 DJ가 되고 싶었다. 음악에 '꽂힌' 것은 그보다 3년 전이다. 부산에 있는 큰집에 놀러 갔다 사촌 언니를 따라서 서면에 있는 떡볶이 가게에 들르게 됐다. '도끼 빗'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DJ가 있는 곳이었다.

그 DJ가 튼 팝송 하나가 허 씨 가슴을 때렸다. 노래 제목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힘이 있으면서도 잔잔한 선율에 반한 소녀는 꼭 음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싶었다.

방송 DJ가 되려고 마음먹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음악을 많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레코드 가게에 취직했다. 이것이 허 씨가 레코드 가게와 맺은 첫 인연이다.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면서 '음악 다방' DJ로도 활동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셈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돈'이라는 현실도 생각해야 했다. 4년쯤 일을 하다 레코드 가게를 그만뒀다. 그러나 인연은 끈질겼다. 마산 오동동에 새로 레코드 가게를 내려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꼭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허 씨는 예전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조건으로 딱 6개월만 일하겠다고 말하고 일을 다시 시작했다.

약속한 6개월이 지난 그해 12월, 허 씨는 레코드 가게를 그만두지 못했다. 가게 사장이었던 남자가 허 씨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레코드 가게는 이제 그의 인생이 됐다.
"1984년에 2만 5000개였던 레코드 가게가 지금은 250개로 줄었습니다."

허 씨는 오동동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가게가 좁았지만 손님은 많았다. 대여섯 명이 가게에 들어오면 꽉 찼다. 가게 밖에서 손님이 찾는 음악 이름을 소리치면 LP 판이 손님과 손님의 손을 거쳐 전달됐고 돈도 같은 방식으로 받았다. 수입도 꽤 짭짤했던 시기다. 허 씨는 이 당시 전국에 레코드 가게가 2만 5000개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현재는 약 250개 정도가 전국에 있다고 하니 20년이 지나면서 10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단골 할아버지 등 음악 통해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아"

레코드 가게가 줄어든 것은 mp3 영향이 가장 크다. 허 씨 가게 역시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수입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최근 매출을 10년 전과 비교하면 반 정도로 줄었다. 지금은 정확히 가게를 현상유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음악 중독인 것 같아요. 가게에서 계속 음악을 듣고도 집에 가면 또 음악을 틀지요."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문을 닫는 레코드 가게가 많아졌지만 허 씨가 계속 이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는 음악이 좋고 음악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단골손님 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다. 뜻밖에 젊은 음악을 찾는 분도 있다. 한 번은 나이가 60살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와서 '최성수' 노래를 찾기에 참 젊게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그 할머니는 어머니께 줄 선물을 고른 것이었다. 할머니는 더 젊게 사셔서 요즘 청소년이 듣는 노래 CD를 사 가셨단다.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사면 설레지요."

허 씨는 인터넷으로 내려받는 것보다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샀을 때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을 강조했다. 그는 음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설렘을 판다고 했다.

/경남도민일보 김근주 기자(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