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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빈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내 맘대로 세계여행](9) 아시아 인도 편 - 여행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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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째 비가 내리지 않아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한 시골마을. 물이 귀한 탓에 어쩌다 한번 배급되는 살수차가 오는 날이면 마을 어귀가 소란스럽다.  
 

인도를 여행한 이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가난과 더러움에 진저리치거나 혹은 문명에서 비켜선 낯선 풍경을 동경하거나. 전자는 물질에 우선 가치를 둔 천박한 '배금주의'가, 후자는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 '목가주의'가 낳은 평가다.

이들 모두 어느 한 쪽에 편향됐다는 측면에서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천박한 '배금주의' 시각에 따른 선입관은 많이 줄어드는 양상이다. 가파른 세계화와 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고, 이는 곧 '타자'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내가 본 대부분 여행자 역시 세계 최빈국인 인도의 열악한 현실을 혐오하기보단 이해하려 애썼다.

문제는 이기적 '목가주의'에 있다. 의외로 많은 여행자가 범하는 오류지만, 얼핏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허상 때문에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목가주의'란 현대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옛 정취, 이를테면 시골이나 전원생활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흔히 인도를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고 일컫는다.

인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역시 머리를 산발한 구도자나 소와 사람이 뒤섞인 들녘이다. '이기적'이란 관형어를 붙인 이유는 이러한 이미지가 당사자인 인도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3자가 미화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생존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앞에 "문명화 진행되는 게 정말 안타까워"

이기적 '목가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우연한 계기로 두 달 경력의 초보여행자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됐다.

인도인에게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북부 휴양도시 마날리로 향하던 중 한 서양여행자를 만났다. 으레 하는 눈인사와 통성명이 오간 뒤 대뜸 그가 나의 인도 여행지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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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시골마을은 전기나 수도처럼 생활에 필요한 기본시설조차 변변하지 못하다. 한 여인이 마을에서 2km 떨어진 우물에서 힘겹게 물을 떠 가고 있다.  
 

"바라나시, 델리, 다람살라, 아그라…"  몇 마디 채 내뱉기도 전에 말허리를 잘라내더니 그가 퉁을 놓았다.  "잠깐만요, 온통 발전한 도시들뿐이네요. 거긴 인도가 아니랍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진짜 인도를 경험하지 못했군요."

이어 그는 듣도 보도 못한 지명을 줄줄이 열거한 후 말을 이었다. "내가 다녀온 곳들은 여행 관련 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시골 중에서도 오지예요. 전기는 물론 물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가난하지만, 모두들 행복해 보였어요.

심지어 걸인들조차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제가 본 것이 인도의 진짜 모습이에요. 앞으로도 인도가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요. 건물이 들어서고 자동차가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 인도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당신이 본 것은 인도가 아니다'…, 나의 인도 여행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 그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화두를 던진 채 그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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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과 나무를 얽어 만든 토담집 사이로 소달구지가 지나가고 있다.  
 

심란한 와중에 마드야프라데시 주의 이름 모를 시골마을에 들를 기회가 생겼다. 흙과 지푸라기를 얽어 만든 허술한 움막, 전기를 기대하는 건 고사하고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소달구지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의 오지였다. 특히 4년째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탓에 마을은 물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부녀자와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을에서 2km나 떨어진 우물까지 물을 길으러 다녔다.

한 소년의 길 안내를 받아 우물을 찾았다. 마를 대로 말라 바닥을 드러낸 우물. 그 속에는 코를 자극하는 썩은 물이 벌겋게 고여 있다. 하지만, 유일한 젖줄인 만큼 아무도 개의치 않고 물을 떠 간다. 사정이 이러니 어쩌다 한 번씩 물을 지원하는 살수차가 오는 날이면 마을 어귀가 아수라장이 된다.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낯선지 내 주위로 반라의 아이들이 모여든다. 주요 부위만 살짝 가렸을 뿐 옷은 때 묻은 넝마에 가깝다. 먹을거리를 달라며 내미는 고사리 손엔 곪아 터진 종기와 부스럼이 가득하다. 오염된 물이 아이들의 여린 피부를 갉아먹고 있지만, 병원은커녕 변변한 약국조차 없는 곳에서 치료는 요원하다.

이방인들, 이기적 목가주의 사로잡혀

아이들이 흩어지자 이번엔 장사치와 걸인이 몰려왔다. 행상 중엔 열대여섯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많다. 그들에게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한 마당에 학업은 사치일 뿐인 것을.

원하는 바를 성취한 이들 모두 웃는 낯이다. 초콜릿과 사탕을 쥔 아이도, 단돈 1루피를 받아든 걸인도, 바나나 한 묶음을 판 소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서양여행자가 말한 그대로다. 이들은 과연 삶이 행복해서 웃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데 따른 미소일 뿐이다.

인도의 1인당 평균 소득은 한 달에 6만 5000원에 불과하다. 그마저 평균 소득에도 한참 못 미치는,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든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40%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

이뿐인가. 무지에 따른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도는 에이즈와 영·유아사망률 수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티'(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산 채로 화장하는 힌두교의 악습)와 '명예살인'(여성의 불경을 탓하며 집안에서 아내나 딸을 살해하는 경우), '카스트'(신분제도) 등의 폐단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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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년이 바나나를 사라고 재촉하고 있다. 인도 시골에선 한창 공부할 나이인 학생들이 행상이나 구걸로 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이기적 '목가주의자'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인도 농촌의 현실이다. 이기적 '목가주의'에 사로잡힌 이들 대부분은 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해외여행이란 것이 삶의 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의료, 교육, 문화 등의 복지정책에 길들여진 이들은 휴가나 방학을 이용해 어쩌다 인도와 같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을 찾는다. 그들 나라에선 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 이를테면 벌거벗은 아이들, 쓰러져가는 토담집 등을 사진에 담고 저마다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가난하지만 웃고 있잖아. 정신적으로 행복하기 때문이야. 건물이나 자동차가 들어서고 문명화가 진행되는 게 안타까워. 이런 모습들이 보전돼야 하는데…"

여행자에게도 지켜야 할 윤리라는 게 있다. 현지인의 삶을 미화하거나 혹은 폄훼하는 것 모두 그 윤리에 어긋난다. 여행자의 시각이 흐려질 때, 한 사회가 처한 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기적 '목가주의자'처럼.

/경남도민일보 윤유빈 객원기자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