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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가다

느릿느릿 걷는 길 지리산이 쉬워졌다

(지리산 둘레길 1구간) - 남원 매동마을 ~ 함양 금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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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연간 수십만의 등산객이 찾는 명산이다. 지리산에 최근 등산이 아니라 산책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유는 지금까지의 등산의 개념과 구분되는 걷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길은 산을 둘러싸는 둘레 800리 길로 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이다. 지리산 순례 길인 셈이다.

지리산생명연대와 실상사가 중심이 되어 지역주민과 생태전문가가 참여해 지리산 순환탐방로를 제안한 것이 첫 계기다.

속도의 길이 아니라 느림의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취지다. 국내 최초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지난해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사업은 2011년에 마무리된다.

전라남북도와 경남지역 지리산 자락 100여 개 마을이 포함된 지리산 길은 옛날 숲길이다. 5개 권역으로 나뉘어 있는 지리산 길 전체 구간은 300㎞이며 그중 2개 구간 20㎞가 개방되었다.

그중 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금계마을에 이르는 1구간(13㎞)을 먼저 다녀왔다.

◇매동마을 풍경 = 매동마을에 들어서니 지리산 길 표지판이 손님을 맞는다. 표지판 옆으로 매향정이란 마을 정자가 있다. 정자에서는 노인 세 분이 각자의 일에 열중이다. 한 분은 눈을 감고 누웠고, 다른 한 분은 누워서 책을 펼쳤고, 또 다른 분은 양반다리를 하고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노인 한 분이 돋보기 안경 너머로 알은체를 한다. 이어 매동마을 찬양을 40분 이상 들었는데 전라북도의 독특한 억양이 자연스러워질 정도였다. 정자 한쪽 구석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어머니와 딸이 구간 일정을 짜고 있었다. 같이 출발하자는 말에도 이들 모자는 조금 더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며 손사래를 친다. '지피지기'라지만 '유비무환'이 심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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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길잡이 말뚝 = 매동마을을 출발해 얼마 되지 않아 첫 길잡이 말뚝이 보인다. 지리산 길 요소요소 여러 가지 길 안내 푯말과 표지판들이 잘 되어 있다. 화살표 위 가로줄은 전라도에서는 빨간색, 경상도에서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있다.

아래의 화살표 방향 표시는 빨간색 방향과 검은색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매동마을에서 출발하는 남원~함양 길은 빨간색 화살표 방향이고 반대로 함양~남원 길은 검은색 화살표 방향이다. 가끔 도로에 바로 페인트로 표시해 놓은 안내도 있다. 빨간색 리본도 길 찾는 사람에게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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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길이 시작되는 매동마을 전경. /여경모 기자  
 
덥다. 5분도 되지 않아 목이 마른다. 길은 여전히 콘크리트 길이다. 머리 위에서 악을 쓰면서 내리쬐는 태양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이 상황을 즐기는 수밖에…. 선글라스, 선크림, 챙이 넓은 모자도 심리적 위안은 될지 모르지만 모두 무용지물처럼 느껴진다. 숲을 빨리 푸르게 할 요량으로 심어놓은 리기다소나무 숲길에서 그동안의 열기를 식힌다.

◇산은 산이고 길은 길이다 = 지리산 둘레길은 새로운 길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기 이전부터 구간구간 존재했던 길이다. 일부 구간은 빨치산이 다니던 길이기도 하고 송이꾼들이 왔다갔다해 송이길이란 이름이 붙여진 길도 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샛길도 있고 고추밭을 가로지르는 밭길도 있다. 게다가 밤길에는 무서워 지나지도 않을 무덤 옆길도 있다.

옹달샘 하나가 나온다. 마시기보다 손과 얼굴을 씻는데 적당해 보인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라 시원하다. 얼굴의 물기가 다 마르기 전에 두 번째 마을인 중황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지리산 길이 생기고부터 할머니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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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따라 핀 해바라기가 잠시 시선을 끈다. /여경모 기자  
 

심심하기만 하면 길옆에서 앉아 사람구경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 한번 구경하기 어려운 시골마을에 전국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지나다니는 것을 보는 게 산골마을에서의 유일한 취미라고 한다.

마을창고 뒤 지하수가 시원하다며 씻고 가라고도 하고, 공짜로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도 한다.

◇전라북도, 경상남도 풍경 = 할머니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얼마 걷지 않아 다랑이 논이 시작되면 상황마을이다. 물을 아껴 논농사를 지으려고 계단처럼 여기저기 축대를 쌓아 논을 만들어 놓았다.

위 논의 물이 넘치면 아래 논에 자연스럽게 받아서 다음 논까지 물이 흐르는 시스템이다. 지리산 길 1구간을 '다랭이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누가 어떤 기종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그림이 되는 길이다.

다랑논에 시선을 파는 동안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곳이 바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구분 짓는 등구재다. 등구재를 갓 지났을 때 나오는 마을이 창원마을이다. 땅에는 차이가 없지만 경상도로 넘어오니 왠지 편안해지는 것이 꼭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다.

이곳 마을을 통과하는 지리산 길에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과 맥주를 파는 간이매점이 있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싣고 온 듯하다. 등구재를 넘기 전 할머니와 쓸데없이 비교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을 파는 것은 바람직한 경제활동이라고 자위해본다. 이 마을에선 꼭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며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필요가 있다.

◇"낮잠이나 자고 갔음 좋겠다" = 창원마을 당산나무 쉼터에서 신발을 벗고 누우면 낮잠의 유혹이란 뿌리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절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단축이 목표가 아니라면, 낮잠이 밤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배낭을 베개 삼아 눈을 감는 것도 추억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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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들지 않고 있는 길을 이어서 재활용한 지리산 길은 수십억 원을 들여 닦은 자동차도로보다 더 시대를 앞서가는 듯하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는 하산하는 느낌이 강한 길이다. 길옆에는 온갖 작물이 널려 있다. 고추, 깻잎 등 농작물이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짓밟힌 흔적도 간혹 보인다. 이런 불상사를 염려해 곳곳마다 농작물 주의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사유지의 통행을 허락한 땅 주인들에게 농작물 피해는 통행을 막을 근거를 주는 것 같아 이용객들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무심코 밟은 농작물에 겨우 열린 길이 막히는 사태는 없어야 하겠다.

1구간 마지막 마을인 금계마을에 도착하면 폐교된 의탄 분교가 나온다. 그 옆으로 지금까지 지리산 길로 다녀간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버스정류장이 말없이 손님을 받는다.

주변에 가볼만한 곳<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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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 가장 먼저 선(禪)의 가르침을 전파한 곳이다. 신라 흥덕왕(828)때 중건해 숙종 때(1690)는 36동의 대가람이었다. 오랜 역사만큼 다수의 문화재 등 볼거리가 많고 평지에 있어 관람객이 많다.

사찰 입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큰 법당인 보광전이 있다. 보광전 앞에는 장중한 석등과 훤칠한 삼층석탑 두 기가 관람객의 눈을 확 이끈다. 보통 사람 키의 3배는 됨직한 거대한 석등은 3단의 돌계단에 올라서야 겨우 등에 불을 켤 수 있을 정도로 높다.

거대한 석등도 볼거리지만 옆에 놓인 돌계단을 올라 불을 붙이는 것은 국내 유일의 방식이다. 보광전 오른쪽에는 약사전이 있다. 약사전에는 통일신라시대 4000근의 철을 재료로 만든 철제약사여래좌상이 버티고 있다. 마침 불전함의 돈을 거두는 광경이 눈에 포착된다.

뭉칫돈까지 한 보따리를 가득 채운다. 병든 이들이 많이 찾는 약사전인 만큼 절 안에서 가장 큰 수입원이다. 생태 뒷간(화장실)은 그야말로 친자연적이다. 대소변을 비료로 쓰고자 신식 좌변기 대신 톱밥과 배설물을 그대로 섞는 방식이다. 안내문에는 '냄새는 나지만 가장 환경적인 생태뒷간'이라며 이용객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입장료 1500원.

알아두면 좋아요

지리산 길을 이용하려면 우선 지리산 길 안내센터(063-635-0850)에 들러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을 수 있고 길동무도 만들어 준다.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www.trail.or.kr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여름에는 가시풀이 간혹 다리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될 수 있으면 긴 바지 입기를 권한다.


/경남도민일보 여경모 기자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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