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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

강기갑은 이렇게 살아왔다

전국 최대이변 주인공 사천 강기갑 당선자
76년 농민운동 투신…어김 없이 투쟁 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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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 최대 이변의 주인공 민주노동당 강기갑 당선자가 캠프 관계자들과 자축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김영신 기자



텁수룩한 수염, 회색 두루마기, 농민.

이번 총선에서 '일을 낸' 민주노동당 강기갑 당선자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들이다.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등원한 첫날 강 당선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한결같은 '농민의 아들'이었다.

강 당선자는 1953년 사천에서 태어나 71년 사천농고를 졸업했다. 공무원을 하라는 아버지와 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젖소와 과수를 기르기 시작했다.

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79년 밥을 먹다가 라디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밥숟가락을 던지고 만세를 불렀다. 87년부터 91년까지 경남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 가톨릭농민회를 이끌었다.

와중에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마흔 살 넘은 노총각들이 주위에 넘쳐나자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농촌 총각 짝을 지어주는 데도 애를 썼다. 덕분에 강 당선자도 부인 박영옥 씨를 만나 총각을 면했다.

비슷한 시기, 사천에서 농민회를 만들어 96년부터 회장을 맡는다.

2000년 들어서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과 경남도연맹 의장을 비롯해 전농 농가부채대책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각종 농민운동 현장마다 주축이 됐다.

2003년 자유무역협정과 쌀 개방에 저항해 이경해 열사가 자결했던 멕시코 칸쿤에서의 일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우직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강 당선자를 표현하려고 자주 입에 오르는 일화다.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세계 각국 농민들이 모여들자 멕시코 정부와 경찰은 각료회의장 주변에 삼중 사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시위대의 접근을 막았다. 시위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 강 당선자가 어디서 구했는지 굵은 밧줄을 들고 나타나 바리케이드 한쪽 끝을 묶고서 묵묵히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를 본 시위대가 모두 달려들어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바리케이드가 마침내 무너졌다.

2004년 총선에서 민노당이 13%가 넘는 정당지지율을 얻어 8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국회에 입성시키면서 사상 처음으로 '농민 국회의원 강기갑'이 탄생했다.

당선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뤘을 때 가장 기뻤고, 농장을 일구느라 평생 고생만 하고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슬펐다고 했다.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그는 젖소 90마리, 밤나무 1만 평, 단감 5000평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

금배지와 어울리지 않게 젖소를 키우는 '화제의 인물'로 그치지 않았다. 돌아보면 아무리 점수를 짜게 준다 하더라도 '농민의 대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해냈다. 매년 각종 단체에서 선정하는 우수 국회의원 명단에서 강 당선자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최근 민노당이 분당사태를 겪으면서 큰 혼란에 빠졌을 때, 홀로 한미FTA 비준 동의안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서 단식농성을 벌인 일도 그의 강직함을 보여준다.

/경남도민일보 진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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