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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혁림 화백, 옛 동지를 만나다

송인식 마산 동서화랑 관장과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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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혁림(오른쪽) 화백과 송인식 마산 동서화랑 관장이 기자를 반기고 있다. /여경모 기자  
 

"아~."

대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젊은 시절 우정을 나누던 친구가 하나씩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친구, 후배들의 부음 소식은 세상 풍파 어떤 것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것 같은 망백이 훨씬 지난 지금도 속으로 삼키지 못한 듯하다.

지난달 24일 통영 전혁림 미술관을 찾은 송인식(85) 관장은 오랜만에 '형님' 전혁림(94) 화가를 만나 지난날 같은 세월을 보낸 흔적을 더듬었다. 지역 예술계 '마당발' 송 관장이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에 전 화백은 귀를 쫑긋 세운다. 전 화백은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듣는 도중에도 표정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살았나, 죽었나" = 전 화백의 관심은 지인의 생사다. 지난 시절 같이 탁주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생사를 같이했던 이들이 생각나면 어김없이 사람 이름을 대며 "○○○, 죽었나? 살아있나?"라고 묻는다.

송 관장의 답변에 "죽" 자가 나오면 입을 벌리며 탄식을 내뱉는다. 혹시나 "살" 자가 나오면 그도 놀랐는지 혀를 내밀며 눈이 동그래진다. 전 화백이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차림새나 행동을 설명하면 송 관장의 입에선 얼른 이름 석 자가 나온다.

◇손에 바다를 담고 살다 = 살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은 지팡이를 들었지만 혼자서 걷기도 하고 인터뷰도 가능할 만큼 창창한 모습이다.

물론 조금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그 흔한 보청기도 끼지 않고 말하는 이의 입에다 귀를 내민다.

동상(송 관장)이 온다는 소식에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작업할 때나 마찬가지였고 기름 때를 묻힌 듯 손의 주름에는 예외 없이 코발트블루(전 화백은 '청색'이라 표현했다)물감이 그의 작품만큼이나 선명하다. 게다가 손의 피부도 푸른 봉숭아 물을 들인 듯 푸른 기가 감돌 지경이다. 평생 손을 바다에 담근 탓에 지울 수가 없는 듯하였다.

◇앞으로 남은 작업시간 '6×31×12×…' = 지난 5월, 61년간 해로한 아내의 49재를 지내 몸과 마음이 성하지 않았을 것인데 전 화백은 하루 6시간씩 작업실을 꼭 찾는다. 사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이외는 작업장에 있다고 보면 된다.

작업실 벽에는 지난 2005년 수원 이영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구십, 아직은 젊다'와 2007년 서울 갤러리아이캠에서 열린 개인전 '아흔셋 전혁림 새 그림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작업실에 얼마나 더 많은 포스터가 붙을지는 전 화백 자신도 상상불가다.

◇왕성한 식욕 = 점심을 위해 찾은 미술관 근처 아귀탕집. 전 화백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탕에 텀벙 빠진 아귀를 꺼내어 먹는 모습에서 노 화백의 기운을 짐작게 한다.

밥 한 공기를 비운 것도 놀랍지만 식사 속도도 빨라 젊은 사람보다 먼저 숟가락을 놓는 바람에 오히려 젊은 사람의 식사를 오래도록 구경할 정도였다.

송인식 관장은 "젊은 시절부터 음식을 잘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 시절 쇠고기와 어류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는 기억도 전한다.

◇아직 퇴장은 이르다 = 아들인 서양화가 전영근(52) 씨는 아버지가 장수하는 바람에 '효자' 소리를 곧잘 듣는다. 송 관장도 전영근 화백에게 "백수(白壽)의 몫은 자네에게 있네"라며 아버지의 건강을 당부한다.

오랜만이지만 긴 시간의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전 화백은 며느리의 부축을 받아 떠나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워한다. 그리곤 백발의 청년은 오늘도 예외 없이 작업실로 입장한다.

지역색 담아내려고 서울 안가…나이들수록 강렬한 색에 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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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기자는 송인식 동서화랑 관장과 함께 전혁림(94) 화백 만났다.

송관장과 2시간의 상봉 후 이어진 인터뷰도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백발의 전혁림 화백은 낯선 인터뷰 내내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손자뻘 기자의 질문을 세심히 듣고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탁했을 때는 부끄럽게 속삭이다가도 작품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삶의 연표에서 연도구분은 가끔 가물가물하기도 했지만 작품과 관련된 연도나 구성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지 또박또박 일러주기도 하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 통영에는 왜 예술가가 많이 나오지요.

△ 내가 어렸을 때 토영(통영)에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돈이 많이 돌았던 지역이었지요. 유치환 씨하고 (윤)이상, (김)춘수와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식민지 상황에서 다른 활동보다 예술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토영의 바다는 낭만을 키웁니다. 조각조각 섬과 온화한 기후는 좋은 배경이지요.

- 서울로 가지 않고 지역에 남은 이유는.

△ 작품에는 국적이 있어야 합니다. 제 작품에는 민화적 요소가 많은데 토영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역색을 담은 문양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는 서울만의 독특한 문화가 안보입니다. 만약 서울에서 활동을 했으면 지금과 같은 작품 활동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고생은 덜 했겠지만….

- 요즘 그림에 다른 색이 혼합된다고요.

△ 평화를 상징하는 청색에 이끌려 평생을 주요색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은색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제 그림에는 중간색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서정적인 색이 많이 가미되기 마련인데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노골적인(강렬한) 색에 손이 갑니다.

- 예술가의 선천적 기질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 내가 겪어보니깐 예술은 배워서 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습디다. 배워서 하는 것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주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 화가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

△ 원래 처음부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고 직장생활을 했지요. 당시 통영의 통영금융조합에 다녔는데 그땐 봉급도 많이 받았으니깐 평생 봉급 받으면서 살다가 죽었겠지요.

-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죠.

△ 노 대통령은 2005년 개인전 때 내외분이 함께 찾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드는 전시 작품(통영항)이 있었는데 작품 크기가 커 청와대의 대표적인 공간인 인왕홀에 맞게 절반 정도의 사이즈(길이 7m, 높이 2.8m)로 줄여서 공식의뢰를 해왔습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미술관 방문 당시 70년대 변호사 시절 동료인 조정래 변호사의 재산 1호가 내 그림인 것을 알고 부러워하면서 언젠가 자신도 꼭 구입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지요.

-아직 노무현 대통령의 미술관 방문은 없었지요.

△ 아직 없습니다. 이제 (김해)진영에 내려와 있으니깐 한번 오시겠지요.

-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습니까.

△ 1935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23살 먹던 1939년 왜정시절 부산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첫 수상을 했던 작품 '신화적 해변'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작품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까.

△ 대중가요는 잘 안 듣습니다. 예전부터 진양조 판소리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시인 이태백의 시를 판소리로 읊은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경남도민일보 여경모 기자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