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민/사회

"경찰 눈 피해 돈 털어라" 학위논문 통해 본 보이스 피싱 인출책의 하루

보이스 피싱(전화금융사기) 조직은 크게 중국이나 대만에 본부를 두고 피해자에게 전화를 거는 '콜센터'와 피해자의 계좌에서 돈을 빼내고 이를 운반하는 '국내 조직'으로 나뉜다. 국내 조직은 다시 인출총책을 중심으로 계좌모집책, 인출팀 관리책, 인출책, 인출금 운반책, 환전책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주로 경찰에게 붙잡히는 사람은 실제 은행에 가서 돈을 빼내는 인출책이다. <관련기사 10면>

지금까지 보이스 피싱 피해 사례는 많이 나왔지만 범죄 조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창원 중부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양영진 팀장이 최근 경남대 행정대학원 경찰학과 석사학위 논문으로 낸 <보이스 피싱 범죄의 근절 방안에 관한 연구>를 통해 보이스 피싱 인출책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대만인 청(程) 모(38) 씨 = 한국에 오기 전까지 청 씨는 '백수'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까지 진 청 씨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루를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광고지를 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한국에 가서 관광도 하고 돈도 번다"는 말에 혹한 그는 지난해 11월 한 달 비자를 만들어 한국땅을 밟았다.

2∼3 차례 운반책 접선…협박·유혹에 일 계속

알고 보니 그가 하는 일은 전화금융사기 인출책이었다. 청 씨는 한 달씩 4번을 일했다. 하다 보니 주위에서 경찰에 잡히는 사람도 한둘씩 생겼다. 불안해진 청 씨는 인출총책에게 이제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총책은 그동안 비행기 표 값이며 체류비 등 투자비를 회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할 일이 없던 청 씨에게 하루 60만~70만 원의 수입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청 씨는 결국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중국인 린(林) 모(25) 씨 = 지난 2006년 린 씨는 유학생 비자로 한국에 왔다. 물론 유학보다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를 벌던 린 씨에게 어느 날 유혹의 손길이 뻗어왔다.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서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일을 안 해도 하루에 20만~3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린 씨를 불러내 술을 샀다. 그날 친구는 성 접대까지 하며 린 씨도 자신과 같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린 씨는 덥석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출총책은 린 씨에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로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가족의 인적 사항을 물었다. 만일 찾은 돈을 들고 도망가면 가족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협박도 받았다.

◇인출책의 하루 = 대만인 청 씨나 중국인 린 씨와 같은 인출책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한 조 3∼5명, 하루 20개 정도 통장서 돈 빼내

보통 인출책 3~5명이 한 조다. 인출책은 매일 장소를 바꿔가며 은행에서 현금을 찾는다. 인출책은 매일 아침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그날 범행에 쓸 카드로 1만 원에서 2만 원씩 찾은 후 인출총책이나 중국에 있는 콜센터에 보고한다. 대포 통장의 주인이 혹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거다.

인출팀은 보통 하루에 20개 정도의 통장에서 돈을 빼낸다. 이들이 돈을 빼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6.2분. 빠르면 1분 안에, 늦어도 9분 안에는 돈을 찾는다. 한 명이 하루에 빼내는 돈은 평균 1000만 원 정도다. 이들은 하루 2~3번 인출금운반책을 만나 돈을 건넨다. 돈을 받은 운반책은 다시 환전책에 돈을 주며 이 돈은 경기도 안산 등에 있는 소규모 중국인 슈퍼에서 환전되어 중국이나 대만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에서 인출책이 받은 대가는 대만인은 60만~70만 원, 중국인은 20만~30만 원이다.

2007년 3월에서 올해 3월까지 창원중부서에서 붙잡은 인출책과 인출금운반책 등은 모두 21명이다. 이중 대만인이 6명, 중국인은 15명이다. 30대가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6명, 40대가 2명, 50대가 1명이었다.

양영진 경남 창원중부서 지능범죄수사팀장
피해사례 136건 분석해 <보이스피싱 범죄의 근절…> 논문 써
“국제적 사기 막으려면 청와대 등 상위 정부기관 적극 나서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이스 피싱 피해 확 줄일 수 있다!"

창원 중부경찰서 양영진 지능범죄수사팀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2006년 6월 지능범죄수사팀 일을 시작한 양 팀장은 그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보이스 피싱(전화금융사기) 수사를 하게 됐다. 서울과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개치던 보이스 피싱이 전국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다.

최근 양 팀장은 올해 3월까지 창원 중부서에 신고된 보이스 피싱 피해 사례 136건을 분석해 '보이스 피싱 범죄의 근절 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다. 이는 경남대 행정대학원 경찰학과 석사학위를 위한 것이었다.

"2년 동안 보이스 피싱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법, 금융 등 모든 관계 기관에서는 마땅한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피해자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 또 세상 물정에 어두운 노인들이 주로 피해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40~50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피해 사례를 근본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보이스 피싱을 논문 주제로 정했다."

양 팀장은 논문에서 외국인이나 국내인 이름으로 통장 개설이 쉽고 1회 계좌이체 한도, 1일 예금인출 한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우리나라가 보이스 피싱의 표적이 된다고 추정했다. 또 은행에 위조 여권을 제시해도 위조 여부를 바로 확인하지 않고 피해 예방도 음성 안내나 주의 스티커 위주인데다 이마저도 금융기관이 개별적으로 하고 있어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사기단은 대부분 국제전화나 인터넷 전화를 쓰는 데 추적이 쉽지 않고, 일반인이 사용하는 번호로 위장하고 있어 발신번호 제한이 예방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양 팀장은 경찰 수사에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우선 보이스 피싱은 계좌 추적이나 발신번호 추적 등 전통적인 수사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새로운 수사기법을 개발하고 자료를 축적해 일선 경찰서 수사를 지도할 전담부서와 인력이 없다. 이는 경찰청이 보이스 피싱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라고 양 팀장은 보고 있다.

그는 또 범죄 특성상 피해액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일선 경찰서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사를 벌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다 중국이나 대만과 국제 공조 수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사기단의 몸통을 검거하지 못하는 게 보이스 피싱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

무엇보다 양 팀장은 언론 보도 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했다.

"요즘 보이스 피싱이 무엇이라는 건 다 안다.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도 다들 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 보도는 구체적인 수법보다 사칭 기관을 중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국세청 사칭을 조심하라더니 요즘 우체국 택배 사칭이 유행하니 또 이를 조심하라는 식이다. 사칭 기관이 바뀌면 마치 새로운 수법이 등장한 것처럼 보도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사칭 기관은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금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직접 현금인출기로 가게 하는 방식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때가 있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아도 사기 전화가 아니라 자기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으로 착각해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현금인출기로 유도하는 것 자체에서 사기 전화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양 팀장은 강조했다.

양 팀장이 제시하는 가장 확실한 예방법은 국제전화를 받을 때 "국제전화가 왔습니다"라는 식으로 음성 안내를 넣는 일이다.

"발신번호는 국내 번호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번호가 찍히든 국제전화로 온 것이면 국제전화를 받고 있다는 안내를 하면 된다. 국세청이나 우체국, 심지어 경찰청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 국제전화를 할 일이 없기에 금세 사기 전화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업체들은 음성 안내를 넣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던데 통신 전문가들은 그렇게 큰돈이 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이런 예방책이 효과를 내려면 경찰이 주도해서는 안 된다고 양 팀장은 말했다.

"경찰은 정부 내에서 입지가 좁다. 심각성을 알지만 다른 기관에서 협조를 잘 안 한다. 그래서 청와대나 국무총리실 같은 곳에서 강력하게 추진한다면 보이스 피싱 피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경남도민일보 이균석 기자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