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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농성장에서 명절 보내야죠"

한국씨티즌정밀노조 밤샘농성 137일째
"지난주 타결될뻔 했는데…" 안타까움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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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씨티즌정밀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창원공장 입구에 텐트를 쳐놓고 농성을 하고 있다. / 김구연 기자 sajin@  
 
이동건(34) 씨는 올해 추석 쇠는 걸 포기했다. 대신 회사에서 연휴를 보낼 예정이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다섯 달째 일을 못하고 있다. 그는 일본 자본의 무책임한 철수에 반발해 농성 중인 금속노조 한국씨티즌정밀지회 조합원이다.

지회가 밤샘 농성을 시작한 지 11일로 136일째. 이 씨는 농성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수입이 전혀 없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며 근근이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5살 아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현재 지회 조합원 96명 중에는 중·고생 자녀를 둔 이가 2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그동안 아이들 밥 한 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밀린 학비도 나중에 한꺼번에 갚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11일 오전 취재진이 농성장을 찾았다. 아침 조회를 마친 조합원들이 천막 농성장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조합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한 조합원이 서로 어려움을 나누고 다독이다 보니 정이 많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서로 처지가 비슷해 표현을 안 할 뿐이지 다들 무척 힘들어하고 있단다.

중학생 아들을 둔 조합원 정모(여·44) 씨는 하루 밤샘 농성을 하면 이틀이 피곤한데 집에 가서는 아이를 돌보느라 편히 자지 못한다고 했다. 정 씨는 방학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했다. 끼니를 제때 챙겨주지 못해서다. 그는 아이가 개학하는 날 학교에서 급식을 먹으며 너무 행복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한 여성 조합원은 어린 아이를 돌볼 이가 없어 농성장에 데리고 와 같이 밤을 새우기도 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다른 여성 조합원도 아이가 어떻게 지내나 걱정돼 동생을 집으로 보냈더니 아이가 더운 날씨에 땀 범벅인 채로 뒹굴고 있더라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지금까지 교육비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사정이 많이 어려운 조합원 중에는 20년 동안 하고 다니던 목걸이를 내다 판 이도 있단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합원들은 흐트러지지 않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20명씩 밤샘농성을 벌였다. 지회 사무실 벽에는 음주·도박 금지, 무단이탈·개인행동 금지 등의 밤샘 농성수칙이 적혀 있다. 밤샘 농성을 한 조합원은 다음 날 오전 7시에 회사 정문에서 출근 투쟁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머지 조합원은 오전 8시 15분까지 출근해 오후 5시 15분까지 회사를 지킨다.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일과 시간 그대로다.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같이 먹는다. 조합원 4~5명이 돌아가며 당번을 맡는다. 메뉴는 지회 경제 사정에 따라 다르다. 실제 지난 10일에는 쌀이 떨어져 라면 사리로 만든 자장면을 먹었다.

지회 배소옥(30) 복지부장은 매일 시세를 보고 가장 싼 채소를 사서 반찬을 만든다고 했다. 가능하면 밥을 해먹지만 수요일과 금요일은 라면을 먹기도 한단다. 다행히 지역 시민사회노동단체에서 수시로 쌀과 부식을 보내온다고 그는 전했다.

지난달 30일에는 일본에서 IMF-JC(국제금속노련 일본협의회)와 전통일노조 관계자가 농성장을 찾아 조합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들은 조합원들에게 한국씨티즌정밀을 인수한 고려티티알과 사태 해결이 잘 되면 일본 씨티즌 홀딩스 사장이 직접 농성장을 찾아 머리를 숙여 사과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한국씨티즌정밀지회 조합원들은 지난 주말 드디어 농성이 끝나는 줄 알았다. 당시 고려티티알 사장과 협상이 거의 마무리 되려는 분위기여서다. 하지만, 고려티티알 쪽이 지회 간부 징계를 계속 고집해 다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조합원들은 지회 간부 9명과 조합원 5명에 대한 징계 해고를 철회하지 않고는 문제 해결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것은 양보할 수 있지만, 해고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게 조합원 전체의 의견이라고 했다. 다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같이 어려움을 헤쳐온 동료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경남도민일보 이균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