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윤유빈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①아시아-중국 편: 영국 소도시 옮겨놓은 홍콩과 상하이

서구열강 침탈 치욕의 현장, 오히려 든든한 수입원으로 '재탄생'
번화한 관광 지역엔 노점상·구걸하는 노인 등 소수민족 넘쳐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남도민일보 '기자'에서 '객원기자'로 신분을 바꿨다. 그리고 세계일주에 나섰다. '세계일주'란 거창한 용어가 다소 쑥스럽지만, '세계를 한 바퀴 도는 행위'라는 사전적 의미에 비추었을 때 꼭 맞는 말이다. 2008년 4월 14일부터 1년 간 6개 대륙을 여행한다. 아시아를 시작으로 오세아니아를 거쳐 북미와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순의 여정이다. 남극을 제외한 '지구별' 대륙을 모두 섭렵하는 셈이다.

큰 얼개만 정했을 뿐, 나라별 세부적인 계획은 유동적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마당에 낯선 곳에서의 삶을 예단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왜 떠나느냔 물음에 대해선 당장 할 말이 마뜩잖다. 다만 이번 여정을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비우고, 또 채워 나갈 생각이다. 버려야 할 것과 얻어야 할 것을 현명하게 판단할 때, 비로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만큼, 이번 기획기사에서 다루는 영역에 제한은 없다. 때로는 지구촌 이웃을 소재로 '사람내음' 가득한 글을, 때로는 우리가 가졌던 타 민족에 대한 선입견을 꼬집는 글을 실을 수도 있다. 천운(?)이 따른다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역사적 순간을 생생히 전할지 모를 일이다. 윤유빈 객원기자의 여행담은 매주 한 차례 독자들을 찾을 예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 내 소수민족의 삶은 고단해 보인다. 사진은 이른 아침부터 관광지역에서 과일을 팔러 나온 소수민족들.  
 
여정의 첫 관문인 홍콩과 상하이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두 도시 모두 오랜 시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전력이 있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홍콩을 통째로 할양하고, 상하이를 개방한다는 내용의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중화사상에 깃들어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 치욕스러운 조약이었다.

난징조약이 낳은 '쌍생아'는 이후 철저히 '유럽화 과정'을 거쳤다. 그 흔적은 중국이 지구촌 정세를 좌지우지할 만큼 성장한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영국은 상하이에 외국인 거주지역인 '와이탄'을 조성, 근대 유럽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런던의 시계탑인 'Big ben'을 본뜬 상하이 세관, 그리스 신전 양식을 모방한 상하이 푸둥 발전은행 등 상하이에는 유럽 건축의 사조인 '아르데코'풍의 건물이 넘쳐났다. 150년 간 영국령에 속해 있다가, 고작 10여 년 전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그야말로 영국의 소도시였다.

두 도시는 현재 외국인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특히 중국이란 '파이'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던 유럽 열강의 후손들은 선조들이 건설해 놓은 식민지 관람에 여념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은 난징조약으로 상하이를 개방하게 한 후 현재의 와이탄 지역에 외국인 거주 지역을 조성했다. 사진은 1900년대 초반 런던의 시계탑 빅벤을 본뜬 상하이 세관과 그리스 신전을 모방한 은행.  
 
해마다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만큼, 중국 정부 역시 홍보를 통해 파란 눈의 이방인을 환영하고 있다.

치욕의 현장이 오히려 든든한 수입원으로 거듭난 셈이다.

홍콩과 상하이는 또한 중국의 이중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닮아 있다.

중국인은 홍콩과 상하이를 힘으로 빼앗은 서구 열강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상하이의 상징인 대형 방송탑 동방명주에 자리한 상하이 역사박물관.

이곳에는 상하이의 뼈아픈 과거를 담은 자료가 가득하다. 난징조약 체결을 전후한 150년간의 자료는 서구 열강의 침략행위를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다.

또 중국 정부는 지난 시절 홍콩을 되찾기 위해 영국의 무력 침탈이 부당했음을 국제사회에 적극 호소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은 최근 티베트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탄압, 스스로 논리를 뒤집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 중국'이란 지극히 한족 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상하이의 숙소에서 같은 방에 머물렀던 북경 출신의 한 대학생에게 티베트에 대해 묻자, "중국 문제에 외국인들이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엄연히 독립국이던 티베트를 무력으로 지배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또 중국 정부의 노력 덕에 티베트의 경제 수준이 많이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귀에 익은 소리였다.

티베트 사태가 불거지고 세계 각국이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정책을 비난하자, 중국 정부가 나서 자국 내 소수민족이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홍보한 것과 판에 박은 듯 같은 대답이다.

그렇다면 짧은 기간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내가 보아온 소수민족의 삶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번화한 상하이의 관광 지역에는 어김없이 길바닥에 앉아 장신구를 파는 소수민족이 넘쳐났다.

외국인과 내국인 여행객 사이를 돌아다니며 광주리의 과일을 파는 이들도 모두 한족과는 생김이 확연히 달랐다.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고 휘황찬란한 상하이의 야경이 시작될 즈음,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구걸하던 노인도 소수민족이었다. 황푸강변 산책로에서 새까만 손으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손을 내밀던 아이도 분명 그들의 후손이다.

/상하이 = 윤유빈 객원기자
yyb1980@empal.com

[지구별 단상] 중국정원의 첫손 '예원'  
실수로 조각된 3개의 용 발톱 반역자로 몰렸다가 '기사회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청시대 정원 양식 중 최고로 꼽히는 예원은 그 유려함 때문에 연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상하이 구시가지에 예원이란 정원이 있다. 명청시대 양식으로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중국정원 중에서도 으뜸으로 인정받아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이 예원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명나라의 관료였던 반윤단이란 인물이 1559년 그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이 정원을 지었단다.

효심이 지나쳤던 탓일까. 그는 당시 황제의 상징으로 오직 황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용 문양을 정원의 벽면에 새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원을 둘러싼 벽면에는 발톱이 3개인 용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만약 용발톱이 정상적으로 새겨졌다면 오늘날 예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대신들은 반 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려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역모를 꾀한 혐의로 황실에 붙잡혀 간 반윤단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기지로 목숨을 보전하고, 관직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모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저희 정원에 새긴 것은 용이 아닙니다. 단지 비슷하게 생겼을 뿐 자세히 보면 발톱이 3개뿐 이지 않습니까? 용은 자고로 발톱이 5개인 영물입니다. 따라서 이는 용이 아닙니다."

실제 예원 벽면에 장식된 용의 발톱은 3개였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벽면에 용을 새기던 석공의 실수로 발톱이 3개만 조각됐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이 딱 맞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