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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빈의 내 맘대로 세계여행

[윤유빈의 내맘대로 세계여행]③아시아-중국 편

찬란했던 고대문명의 가교…그 이면에 숨은 '힘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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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옛날 낙타에 몸을 의지한 채 목숨을 걸고 사막을 횡단했던 카라반. 그들의 후손들은 이제 사막을 찾은 관광객을 맞이했다.  
 
중국 대도시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실크로드의 발원지 시안, 다시 하루를 내달려 당도한 실크로드 관문인 둔황. 두 도시에서 나는 과거 카라반이 이룩한 영화와 함께 '승자 독식'의 패권주의를 보았다.

우리가 비단길이라 배워온 실크로드는 과거 동·서양의 상업, 문화, 교통의 교역로다. 한나라 때 수도 장안(현재 시안)을 떠나 서역길에 오른 여행가 장건이 실크로드의 기틀을 마련한 이후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양의 로마까지 동서양의 교류가 꽃을 피우게 됐다.

둔황은 중국 쪽에선 실크로드의 출발지, 반대로 서역 쪽에선 종착지 역할을 하는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다. 실크로드 한가운데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카라반의 목숨을 위협하는 장애물. 따라서 사막을 건너려는 자와 건너온 자 모두에게 실크로드의 관문인 둔황은 각별하다.

'비단길', 서구열강 필요품목 기준서 임의로 작명

자신들의 안위를 신께 의지하려 곳곳에 지은 종교 사원, 각 민족의 언어로 쓰인 경전과 고문서 등은 둔황의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그 중 불교 석굴의 백미로 꼽히는 '막고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인류의 자산이다. 이처럼 동·서양 문화가 맞닿은 실크로드, 그 이면에는 씁쓸하게도 '힘의 논리'가 만연해 있다.

우선 '실크로드'라는 용어부터가 그렇다. 당시 이 길을 통해 서방은 비단을, 동방은 보석과 직물을 주로 수입했다. '비단길'이란 이름 자체가 서방이 필요로 하는 품목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힘의 논리'는 청나라 시절 극에 달한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00년대 초 서구열강은 청나라를 무력으로 개방한 후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을 감행한다. 실크로드의 관문인 둔황부터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이르기까지 수천 점의 문화재가 서방으로 흘러간 것이다.

청나라 무력 개방 후 대대적 문화재 약탈 이어져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분노는 대단했다. 둔황 막고굴을 관람할 때 일이다. 중국 현지인들과 함께 각 석굴을 돌아보던 중 한 지점에서 중국인 가이드가 입에 거품을 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20세기 초 실크로드의 문화재 약탈 현황이 적힌 기록물. 그곳에는 당시 유물을 반출한 서구 탐험가들의 사진과 약력, 빼돌린 유물 개수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함께 여행 중이던 일본인 친구 히로(25·교사)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당시 나는 역사 과목을 가르치다 여행에 나선 일본인 교사와 친분을 쌓았다) 그는 "문화재 반출에 대한 중국인의 분노는 무서울 정도다. 앞으로 중국이 더 성장한다면,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우리들의 문화재를 모두 되찾아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해되는 대목이다. 어느 민족이건 자신들의 문화재가 약탈당한 것에 분노할 당연한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중국은 순수하게 역사의 피해자일까'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실크로드가 낳은 인류의 문화유산은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갈수록 그 빛을 발한다. 티베트와 함께 중국 내 독립을 원하는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위구르인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한 문화유산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한족을 어떻게 바라볼까.

위구르인, 언어·종교·생활방식도 중국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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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석굴의 백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단 막고굴. 서방의 문화재 반출에 호되게 당해서일까? 입구에서 기념촬영만이 유일하게 허용된다(왼쪽) 실크로드 발원지 시안(옛 장안)에는 만리장성과 함께 진시황의 위엄을 드러내는 병마용이 자리하고 있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사후를 지킬 병사와 말 수천 점을 실물과 똑같이 만들어 지하 갱도에 진열해 놓은 것이다.  
 
역사적 배경에서 그 답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 한 무제 때 잠시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다.

따라서 언어도 종교도, 생활방식도 중국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은 한 무제 때 이 지역을 지배한 전력을 바탕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라면 같은 시기 한 무제에 멸망한 고조선을 근거로 한국도 중국 땅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다.)

둔황 숙소에서 만난 위구르인은 중국과 소수민족 간의 이러한 이질감을 생생히 전해줬다. 한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 왁자지껄한 소리가 인도하는 곳에서 나는 위구르 전통음악 공연단과 인연을 맺었다.

위구르 전통복장을 걸치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위구르어로 대화하던 그들은 나에게 찬란했던 고창고성(중국지배 전의 투르판 일대의 왕국)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영어, 위구르어, 한국어 그리고 손·발짓과 필담이 어우러진 대화였다.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분명했다. 위구르인과 중국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자신들 고유의 문화와 가치를 중국인이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

'강자는 약자의 것을, 약자는 더 약한 자의 것을…', 찬란한 고대문명을 낳은 실크로드에서 나는 그 이면을 분명히 목격했다.

/윤유빈 객원기자 yyb1980@empal.com

[지구별 단상] 초보여행자의 '성장통'   
좁은 공간서 사흘 동안 '기차 여행'
바쁜 일정에 찾아온 불청객은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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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 둔황에서 쓰촨성 청두까지 2박 3일. 40시간을 꼬박 기차에서 보내야 했다. 워낙 땅덩이가 넓은 중국이라 대부분의 기차가 침대칸으로 이뤄져 있는데, 보는 바와 같이 공간이 좁다. 기차여행 후 심각한 몸살을 앓았다.  
 

중국 여정이 끝을 향할 때쯤,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40시간에 달한 장거리 기차이동이 발단이 됐지만, 그보다 넘치는 욕심으로 화를 자초한 측면이 컸다.

실크로드에서 출발한 기차는 2박 3일을 쉬지 않고 달리고서야 마지막 목적지인 쓰촨성 청두에 도착했다.

사흘 동안 좁은 공간에서 시체처럼 지낸 탓에 기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 하지만, 휴식보단 한 곳이라도 더 봐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나는 여독을 짊어진 채 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몸살'이란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여파는 꽤 오래갔다. 이틀을 꼬박 앓은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성장통'을 앓고 난 후 초보여행자는 그간의 여정을 돌아봤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의무감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발품을 판 기억밖에 없다.

누군가 말했다. "일상이 삶의 '산문'이라면, 여행은 삶의 '시'다"라고.  나는 여정의 패턴을 바꾸리라 결심했다. 긴 호흡으로 쉼 없이 써내려가는 산문이 아니라, 운율과 리듬, 그리고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시 같은 여행을 즐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