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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히스토리]⑤함안

함안에는 아직 고려국 백성이 살고 있다.

함안 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 이곳에 모여 사는 고려인들은 아직도 자신이 고려 백성이라고 여긴다. 이런 동네가 아직도 있었단 말인가. 레저 팀이 찾은 지난달 29일에는 '고려인'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이 사는 곳을 곳곳이 둘러볼 수 있었다. 함안지역 문화유적 답사에는 전정열(63) 문화해설사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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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성균관 진사 모은 이오 선생이 만든 고려동 유적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 안에는 여전히 고려국 =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고려동 유적지는 고려시대 성균관 진사 모은 이오 선생의 고려에 대한 애틋한 충절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내려왔다. 그리고 외부와 연락을 끊고 이곳에 높은 담을 쌓고 나서 담 안에서 논밭을 일구고 우물을 파며 자급자족하게 했다.

그래서 이곳 마을은 아직 '담안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이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는 고려마을이란 것을 알고 들어오라는 듯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까지 세워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기 전 자미단(紫薇壇)이 보인다. 그곳에 핀 수천 개 가지를 가진 백일홍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꽃말이 절개, 충절인 것을 보면 고려동이 있는 한 자리를 지킬 것이다. 9만 9000㎡의 땅에 담을 쌓고 자신만의 고려국을 만드는데 조선의 개국 공신들이 가만히 놔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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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정 조삼 선생을 추모하고자 만든 '무진정'.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개성의 다른 충신들은 죽음을 당했지만 당시 산골벽지인 이곳에 자리 잡은 이오 선생은 화를 면하셨지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고 당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시기에 충절을 지키는 사람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집 안채에 들어서면 복정(鰒亭)이란 우물이 눈에 띈다. 집안에 아픈 이가 있었는데 우물에서 나온 전복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우물에는 '복정'이라고 쓴 글씨가 음각된 돌이 박혀 있다. 하지만, 관리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대리석으로 현대식 우물로 고쳐버린 탓에 전혀 고풍스러운 맛이 나지 않는다. 이제 사용하지 않아 이 우물로 흐르던 연못도 흐름을 멈추었다.

이오 선생은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후손에게도 조선 왕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에 자신의 신주를 이곳에 묻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까지 했다.

그에 따라 이오 선생의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그 누구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유언을 후손들이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그 후손들은 관찰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들이 역사에 드러난다.

◇무진정 VS 이수정 = 가야읍을 조금 벗어나면 '무진정(無盡亭)'이 나타난다. 무진정은 무진정 조삼(趙參·1473~?) 선생의 덕을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다. 팔작지붕의 색 바랜 정자지만 기풍만은 독특하다.

정자에는 우물정(井)자의 방이 하나 있는데 온돌이 아니라 마루방이다. 시원할 때만 이용했으리라 추정된다. 물론 지금은 여름이면 낮에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밤에는 지나가는 대학생들의 무료 숙박 장소로 쓰일 정도로 인기다. 정자를 빙 둘러싸는 문도 들문이라 사방의 문을 들어 올리면 주변에 이만한 경치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무진정은 아슬아슬한 만큼 경치도 일색이다. 정자 앞에는 낙화놀이로 유명한 '이수정'이란 연못이 있다.

근데 지금 무진정과 이수정이 동정문(動靜門)을 사이에 두고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낙화놀이의 이름을 무진정으로 하려는 조씨 후손들의 주장과 이수정을 고집하는 관청의 삐걱거림으로 낙화놀이가 흥겹지 못하다. 지금도 여전히 동정문은 열쇠로 잠겨 있다. 서로의 주장이 타협을 보기 전까지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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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인 중 최고로 치는 '상품상생인(원 안)'을 하고 있어 연구가치가 높은 '대산리 석불'.  
 
◇옛 절터는 어디 가고 불상만… = 무진정에서 검암천을 건너면 대산면에 한절마을이라 부르는 '대사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느티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있는데 그 사이에 관을 쓴 관세음, 대세지 보살상이 얌전히 서 있다. 어른 키 크기만 한데, 자를 댄 듯 서 있는 모습이 뻣뻣해 보인다.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에 눈이 팔려 있다면 눈을 돌리자.

한발 물러서서 가부좌를 튼 아미타불이 보물 제71호 '대산리 석불'이다. 최근 이곳 대사 석불이 학계와 불교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얼굴도 신체 일부도 떨어져 나간 석불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불상의 손모양인 수인(手印) 때문이다.

대사 석불은 '아미타 구품'이라는 수인 중 최고로 치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의 수인을 하고 있다. 두 검지를 안경모양처럼 만든 수인은 국내서 드문 수인이다. 9단계의 중생 중 가장 높은 단계의 중생을 구제하는 석불이기 때문에 연구가치가 있는 불상이다.

이런 희귀한 불상이 노천에 비바람을 맞으며 있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불교계에서 성역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절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대사(大寺)'라는 이름부터 이 마을에 큰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사 석불 뒤편에 80㎡ 남짓한 공터가 있다. 민가 담벼락과 마주하고 있는데 담벼락 밑에 빨간 말뚝을 박아놓았다.

전정열 해설사는 "원래 민가가 있던 자린데 빨간 말뚝자리가 우물자리입니다. 통설에 의하면 예전에 고승이 우물에다 보물을 숨겨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 땅을 파보거나 조사를 벌인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살짝 궁금해진다. 보물이 많은 동네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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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열 해설사가 추천하는 함안의 특별한 유적


함안 군북면 동촌리에 가면 지석묘가 널려 있다. 이곳에만 27기의 고인돌이 몰려 있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지석묘는 이숙자(79) 씨의 집 마당에 있는 지석묘다. 다른 것과 달리 고인돌에 수많은 성혈(알 구멍) 자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알 구멍의 개수만도 398개다. 크기도 제각각이라 언뜻 보면 밤하늘의 별자리 같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도 지정 문화재지만 관리는 집주인이 더 열심이다. 집안의 수호신이라고 여기는 할머니 덕분에 지석묘 주위를 잔디로 꾸미고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 구경 오는 답사객만 한둘이 아닐 텐데 항상 집 문도 열어두고 있다.

덕분에 자식들이 무탈하게 자랐고 성공했다는 할머니의 믿음이 더 마음에 끌리는 대목이다.

/경남도민일보 여경모 기자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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