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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산 서고 물 누우니 여기가 명당이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히스토리]⑩ 합천

함벽루는 크기로 따지면 동네 정자에 불과하지만 단 한 차례의 소실도 없이 고려시대부터 온전히 보전되어온 누각이다. 팔작지붕에 떨어진 빗방울은 처마를 거쳐 황강으로 떨어진다.

합천은 조선시대 이후부터 불린 지명이다. 이전에는 협천(俠川)이라 하여 '접은 내'를 뜻하는 지명이었다. 들판보다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분지의 넓은 평야를 가진 지금의 초계면과 적중면, 삼가면이 편입되면서 세 개의 고을을 합한 이름인 합천으로 부른다.

가야산, 오도산, 황매산으로 둘러싸인 합천은 남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세다. 산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명당자리가 많다는 이야기다.

합천이 곧 풍수의 연구소가 되어버린 듯하다. 가령, 남서향이란 조건보다 배산임수를 택한 해인사의 배치에서부터 신라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스님이 오도산의 기운과 자태에 빠져 7일 동안 산 정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 인왕산 도읍을 풍수지리로 관철한 이야기가 내려오는 무학대사의 고향도 합천이다.

합천의 역사 중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그중 몇 가지만 뽑아 합천의 문화해설사 이우열(66) 씨의 도움으로 둘러봤다. 반풍수(半風水), 기사를 망칠까 염려하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가야산·오도산·황매산으로 둘러싸인 흔하지 않은 지형
곳곳에 명당 많고 풍수지리에 얽힌 위인 이야기도 많아


우암 송시열이 함벽루 돌병풍에 쓴 '함벽루'.

◇천하를 다스릴 명당 '무지개 터' = 합천에서 명당을 따지자면 어떤 곳보다 첫째로 꼽히는 곳이 무지개 터다. 천하의 명당이라 말하는 무지개 터는 명당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일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 버릴 양 돌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모산인 황매산(1113m)을 바라보는 모산재(767m)의 동남쪽 줄기에 있는 무지개 터는 말굽 형으로 이루어진 바위능선의 꼭짓점 자리다. 예전에는 무지개 터에 사시사철 물이 괴어 있는 작은 못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물기만 촉촉하게 젖어 있다. 모산재의 어원인 못재도 작은 못에서 변한 말이다. 신령스러운 바위인 무지개 터에 올라서기만 해도 천하절경의 명당임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경상도에는 바위로 된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솟아 있는 형태의 산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바위 봉우리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하여 지극히 높고 수려하다"고 적어놓았다.

이중환이 가야산의 매력에 푹 빠져, 건너 산(황매산)을 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명당에 어울리는 사찰로 비교하더라도 가야산의 해인사 못지않게 모산재를 낀 영암사도 풍수지리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산재 말굽 형의 바위를 품고 중앙에는 영암사지가 있기 때문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곳이다.

이곳 근처에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해 기도를 올린 국사당이 있다. 풍수지리를 따라 국정을 운영했던 태조 이성계를 위한 기도장소가 무지개 터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또한, 1997년부터 일제가 박아놓은 혈침 뽑기 운동을 벌인 민족정기선양위가 무지개 터에서 뽑아낸 혈침(대못)만도 2개나 나왔다.

이우열 해설사가 뇌룡정 마루에 걸터앉아 뇌룡정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완전무결 명당을 찾다간… = 함벽루로 향했다. 황강을 내려다보는 좁은 언덕에 세운 조그만 누각이지만 한 번도 소실된 적이 없어 옛모습 그대로다.

800년 된 현판이 어우러진 돌 병풍과 함께 아기자기하다. 돌 병풍에는 이곳에서 놀다 간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명, 퇴계, 우암 등 널리 알려진 이들과 함께 이름 모를 선비들과 현감들이 돌 구석구석을 채웠다. 통사(統使) 박기풍의 글도 보인다. 통영으로 가고자 이곳을 들러간 모양이다. 작은 누각치곤 이름과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오는 곳이다.

누각에서는 황강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강과의 거리를 비유하자면 영남루, 촉석루는 종합경기장에서 축구를 보는 것이고, 함벽루는 축구전용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누각 앞 치수공사를 하느라 기계 소리에 풍악을 울리기 어려워 보인다.

전통적인 명당자리인 묏자리도 한번 볼 양으로 합천 이씨 시조 이개(李開)의 묘를 찾아 올랐다. 용주면 망월산 토끼슬에 있는 시조 묘는 망월산 기슭에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앉은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배산임수도 잊지 않았다. 묘사 때는 산시제를 먼저 지내기 위한 곳도 갖추었다. 무덤 근처 바위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어 바위에 기(氣)가 맺히게 하였다.

합천 이씨 시조의 묘. 망월산이 품에 안고 있다. 망월의 '월'은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달처럼 생긴 앞산 '월암산'을 말한다.

삼가면에 있는 뇌룡정(雷龍亭)에도 들렀다. 1548년에 세워진 뇌룡정은 남명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고자 세웠다. 우측을 중요시하는 배치에 따라 우측 강당건물이 크고 우측 큰방이 남명의 서재다.

뇌룡정의 입구 양쪽기둥에 걸린 주련을 읽어보면 '연못에서 잠자는 용이 깨어나면 뇌성벼락을 친다'는 문구를 담고 있다. 뇌룡정의 이름이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면 '아하!' 하고 깨닫는다.

뇌룡정이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단성소(丹城疏) 때문이다. 당시 국사를 좌지우지했던 문정왕후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과부라고 했고 임금에게는 '마마보이'라며 국사가 위태롭다는 글을 왕 앞에 올린 것이 단성소다. '뇌성벼락'은 이 단성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풍수학자들도 남명의 기개와 함께 뇌룡정의 산세를 함께 해석한다. 주변의 온순한 산세와 반룡농주형이라는 형국의 터가 맞아떨어진다고 말한다.

명당과 관련해 이런 말이 전해진다. "명당자리는 묘 하나 쓰면 다른 곳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남의 명당자리를 뺏으면 자리의 기가 빠진다". 명당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완전무결한 명당인 전미지지(全美之地)는 없다는 이야기를 믿고 명당을 구경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이우열 해설사가 전하는'전설 따라 명당 따라'

◇광대무덤 = 율곡면 항곡리에 가면 광대무덤이라 부르는 묘가 1기 있다. 약 33㎡(10평 남짓) 되는 묘로 화강석으로 잘 다듬어진 묘다. 양쪽에 망두석과 석상, 석등이 놓여 있다. 구전은 고려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묏자리가 탐나는 누군가가 묘를 쓰고자 동네에 광대를 불러 사람들이 광대를 보러 가고 없는 사이 만든 묘라고 전해 내려온다.

이상한 점은 누구의 묘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묘의 규모로 봐서 큰 공을 세운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도굴할 수 없게 묏자리 전체를 자연석으로 깔고, 잘 깎은 화강석을 사방에 빈틈없이 축조해, 완전히 돌로 '무장'했다.

◇먹을골 = 봉산면 죽죽리 대대 마을에 먹을골이라는 곳이 있다. 먹을골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지은 이름이라 전해진다. 골짜기가 깊어 많은 물을 머금을 것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결과적으로 이곳에 합천댐 공사가 들어서 발전 용수로의 굴을 내는 입구가 먹을골로 정해지다 보니 실제로 물을 많이 먹는 골짜기가 되었다.

/경남도민일보 여경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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