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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정

쇠고기 원산지 표시 ' 하나마나'

농림식품부 '미국-호주산 식별 불가' 인정
유전자 검사로 한우-비한우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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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 식당이 메뉴판에 붙여놓은 '국내산 한우만을 취급합니다'는 안내문. /김주완 기자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음식점에 쇠고기 원산지를 표시하도록 했지만, 이 또한 '눈가리고 아웅'식 정책으로 드러났다.

식당 업주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 등으로 속여 팔 경우, 이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단속 주무부처인 농림수산식품부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 농산물품질관리원과 축산과학원 관계자는 "2007년에 개발한 유전자 식별법으로 한우인지 아닌지는 99% 이상 식별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한우가 아닌 쇠고기가 미국산인지 호주산인지 등은 식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즉, 현재까지 개발된 유전자 식별법으로는 한우인지 비한우인지만 알 수 있고, 국내산 중에서도 소의 털색을 결정하는 모색 유전자를 이용해 한우(갈색)인지, 젖소(흑색)인지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산 쇠고기임을 솔직히 표시하는 경우라도 광우병 위험이 높아 국민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30개월령 이상인지 여부는 표시 대상에서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집단급식소라 하더라도 50명 이하의 소규모 급식소는 원산지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고, 축산물을 조리·판매하더라도 '부수적으로 제공하는 반찬류'는 빠져 있어 쇠고기 미역국이나 장조림 등은 원산지도 모르는 채 먹어야 할 판이다.

이와 관련, 진보신당은 31일 논평을 통해 "전국 2만8367개소의 보육시설중 70%가 넘는 1만9891개소가 50인 미만이며, 이는 전체 보육시설의 70%가 넘는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50인 미만의 기업체, 기숙사, 공공기관, 병원, 학교 등 소규모 급식소 역시 원산지 표시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제도 자체가 졸속으로 마련된 흔적도 역력하다.

당장 이달 22일부터 제도가 시행되지만, 구체적으로 식당의 어느 위치에, 어떤 형식으로 원산지를 표시해야 하는지도 제시하지 않아 식당업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메뉴판이나 푯말, 게시판 등 업소의 특성에 맞춰 표시하라고 할 뿐, 통일된 양식이나 규격은 내놓지 않고 있다. 이번 제도 시행으로 원산지 표시를 해야 할 곳은 전국에서 무려 64만3000개소에 이른다. 경남에도 일반음식점 4만 3274곳, 휴게음식점 2095곳, 위탁급식영업 549곳, 집단급식소(학교 등) 2539곳 등 4만 8457곳이 음식점 원산지 표시 대상이다.

특히 정부가 법 공포 즉시 원산지 허위표시 신고 시 최고 200만 원의 신고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혀 '식파라치'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마산의 한 식당업주는 "원산지 표시를 강화하겠다는 정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실효성도 없는 제도를 졸속으로 밀어붙이는 감이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원산지 표시 전국 모든 음식점 확대시행…무엇이 문제인가?

지금까지 대형음식점(300㎡ 이상)만 하도록 돼 있던 쇠고기 원산지 표시가 전국의 모든 음식점으로 확대된다. 무려 64만 3000개 업소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부가 갑작스레 이 제도를 시행하는 이유는 뻔하다. 광우병 우려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해 반대여론을 어떻게든 무마해보려는 것이다. 농림수산식품부가 대한민국 정책포털에 공개해놓은 '바뀌는 음식점 원산지 표시제 알아봅시다'에도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관련하여 국민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수입쇠고기 원산지 식별 불가능 =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시행하는 이 제도로 정작 미국산 쇠고기를 식별해낼 수가 없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이라 할 수밖에 없다.

농식품부에 확인해봤더니 실제로 그랬다. 이 제도에 따라 원산지 표시를 아예 하지 않는 없소는 그 자체로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하지만, 원산지 표시를 하면서 미국산을 호주산으로 허위표시해놓았을 땐 처벌받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의 유전자 감식 기술로 한우냐, 아니냐는 식별할 수 있지만 수입쇠고기 중에서 미국산이냐, 호주산이냐, 뉴질랜드산이냐는 식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미국산 쇠고기 중에서도 광우병 위험이 특히 높은 30개월령 이상 쇠고기까지 수입하게 된 데 가장 큰 우려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과연 정육점이나 식당에서 상대적으로 값싼 미국산 쇠고기를 사먹게 될 경우, 30개월 이상된 소인지, 미만 소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수입이 될 때부터 월령을 알 수 없는 상태로 통관이 될 뿐 아니라, 표시 대상에도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국민의 불안을 음식점 쇠고기 원산지표시로 해소할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제도의 시행으로 외국산을 한우로 속여파는 행위는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사법경찰관 1000명이 70만 개 업소 단속 =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음식점 원산지 표시 확대 시행에 따라 단속 대상 업소가 64만 곳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전국적으로 일반음식점 58만여 곳, 휴게음식점 2만여 곳, 위탁급식영업 7200여 곳, 집단급식소 3만여 곳이다.

여기에 종전에 해오던 생산(수입)업체, 유통업체까지 더하면 농산물품질관리원이 담당해야 할 원산지 표시 관리 단속 대상은 70만 곳이 넘는다. 또 쇠고기 쌀 등 원산지 표시 관리 단속 대상 품목은 531개에 달한다.

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음식점 원산지 표시 확대 시행에 따라 특별사법경찰관을 종전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또 생산자나 소비자 단체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정예감시원 3000명을 포함한 2만 5000여 명의 명예감시원과 230여 개 자치단체 단속인원 1명 등과 함께 원산지 표시 단속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사법권도 없고 공무원·전문가도 아닌 명예감시원들이 제대로 단속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사법경찰관 1000명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1년에 70만 곳이 넘는 곳을 관리해야 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원산지 표시 관리 단속의 실효성을 해당부처 공무원들조차 믿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원산지 표시, 식파라치만 좋은 일 = 지난해 6월 통영시내 재래시장 상인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식파라치가 재래시장 내 족발·순대·반찬 가게 등을 상대로 원산지 미표시 등 신고포상금을 노리고 한바탕 휩쓸고 갔기 때문이다.

당시 원산지 표시를 해야 하는지조차 잘 몰랐던 재래시장 상인들은 수십만 원에 달하는 과태료를 물었다.

통영만 식파라치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포상금을 노린 식파라치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자 지난해 4월 당시 노무현 정부는 포상금액을 줄이는 등 포상금 지급기준을 바꾸기도 했다.

창원과 마산 각 1곳에서 음식점을 하는 ㄱ씨(39)는 "음식점 주인도 다른 곳에 가면 소비자인 만큼 음식점 원산지 표시 확대 시행을 마다할 수만은 없다"면서도 "정부가 급작스럽게 음식점 원산지 표시를 확대하겠다고 해 솔직히 난감하다"고 말했다.

그는 "원산지 표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차림표는 어떻게 꾸밀 것인지 공통된 지침도 없어 그저 지켜보고 있다"며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때문에 졸속으로 시행을 앞당겼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 김범기 기자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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