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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혼을 빼앗긴' 보이스 피싱 피해자

설마설마 하면서도 '걸려드는 덫'…은행 직원 안내·경고 문구도 '딴나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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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고 현금 자동입출금기 앞까지 갔다면 이미 끝난 일이다."

보이스 피싱(전화금융사기)과 관련해 은행 직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투와 황당한 상황 설정은 변함이 없지만, 여전히 속는 사람은 있다. 은행마다 자동입출금기에다 나름으로 눈에 띄는 모양과 크기로 조심하라는 문구를 넣었지만 이미 '혼을 빼앗긴' 피해자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실제 보이스 피싱 피해자를 상대한 은행 등 금융업체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계좌이체하고 말아

◇은행직원도 못 믿어 = 지난해 11월 중순 창원시 상남동 외환은행 창원지점에 50대 초반의 남자가 급히 들어왔다. 현금 자동입출금기 앞에 선 이 남자는 들어오기 전부터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주위 사람의 눈치가 보이는 듯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청원경찰 김모(여·24) 씨는 이 남자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헐레벌떡 들어오는 모습과 현금입출금기 앞에서 허둥대는 모양, 곁에서 슬쩍 들은 전화 통화 내용으로 보아 보이스 피싱 피해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씨는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고객님?" "아닙니다. 아닙니다." 뜨끔한 표정의 이 남자는 손을 휘저어 김 씨를 보냈다. 남자는 계속해 자동입출금기 숫자판에 손을 대고 있었다. 김 씨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말했다.

"손님 지금 어떤 전화를 받으십니까? 제가 보기엔 사기 전화 같은데요!" 그래도 이 남자는 꿈쩍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결국, 김 씨는 창구 직원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수백만 원의 돈이 넘어간 뒤였다. 창구 직원은 바로 지급정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지금 보이스 피싱 피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이 남자는 믿지 않고 직접 경찰서에 가서 확인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창원에 있는 한 중소기업 대표이사였다. 그는 지난주 담당 경찰서로 찾아와 돈을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하지만, 김 씨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반신반의하면서도 = 지난달 초 오후 5시께 농협중앙회 창원지점에 50대 초반의 부부가 들어섰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시 금융업무는 끝났고 직원들은 하루 일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마침 이성섭 부지점장이 이들을 보고 다가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이 부부는 개인정보가 누출됐으니 현금 입출금기로 가서 지금 가진 모든 돈을 한 통장에다 모으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말투가 이상하긴 한데 경찰이라고 하니 안 믿을 수는 없고 해서 일단 통장을 만든 농협에 오긴 왔다고 했다.

이 부지점장은 바로 "이건 사기입니다. 절대 이체를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후 부부를 의자에 앉혔다. 그때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 부지점장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거기가 어딥니까?" "○○서 박 형사입니다." 역시 어색한 말투였다.

"제가 이쪽에서 오래 근무해서 경찰을 잘 아는데요, 실례지만 ○○서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요?" "농협중앙회 창원중앙지점 부지점장입니다." "당신 이름이 뭐요? 좋아 내가 조치하겠어!" 결국, 남자는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 부지점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로 전화를 해 확인도 했다. 역시 그런 전화는 없었다.

금융업체 직원들은 이처럼 계좌 이체를 하고 금방 지급정지를 하거나 직원에게 물어보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농협중앙회 창원중앙지점 이성섭 부지점장은 보이스 피싱은 결국 '확률 게임'이라고 했다. 1000명에게 전화해서 한두 명만 걸려도 남는 장사라는 뜻이다. 이 부지점장은 이미 사기범의 꾐에 넘어간 고객이라면 아무리 교육을 잘 받은 창구 직원이나 경고 문구가 선명한 현금 자동입출금기라도 막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 이균석 기자

2008/05/07 - [시민/사회] - 보이스 피싱, 이번엔 '일제 징용' 판다